
서명: 키르케
저자: 매들린 밀러
출판사: 이봄
이 소설은 저자가 고등학교에서 고대 그리스어, 셰익스피어를 가르치며 썼던 첫 장편소설 《아킬레우스의 노래》 이후 두 번째로 집필했다. 오딧세이에서 고향으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의 발목을 잡았던 마녀로 등장하는 키르케의 이야기를 길게 풀어낸 소설이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로 태어나 존재감이 미미한 님프로 지내다가 마법의 힘을 발견하고, 그 힘 때문에 무인도로 추방당한다.
(발췌) 그가 살짝 미소를 지었을까? 아마 나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평생 꿈조차 꾸지 못한 일을 저지르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으니까. 나는 몸을 돌려서 그의 곁을 떠났고 흑유석이 깔린 복도를 다시 걸어갔다. 연회실에서는 신들이 서로의 무릎을 베고 누워서 계속 술을 마시며 웃고 있었다. 나는 그들을 지켜보았다. 내가 없다는 걸 알아주는 이가 있길 바랐지만 아무도 몰랐다. 어느 누구도 나는 안중에 없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돌멩이였다. 수천 곱하기 수천의 어린 님프 가운데 한 명일 뿐이었다.
(발췌) "그의 가장 큰 자랑이라니?"
"파트로클로스라는 연인이요. 그는 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선한 사람들이 전부 그랬던 것처럼요. 그가 죽자 아킬레우스는 실성했습니다. 거의 미친 수준이었죠."
(발췌) 내 섬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다. 내 약초, 내 집, 내 동물들.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이런 식으로 계속 이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페넬로페와 텔레마코스가 친절하거나 말거나 상관없었다. 그들이 평생 여기에 머물거나 말거나, 그녀는 내가 그토록 바라던 친구가 되고 그는 또다른 무언가가 되거나 말거나 결국에는 눈 깜빡할 순간에 불과할 것이다. 그들은 시들 테고 나는 그들의 시신을 태우며 그들에 얽힌 추억이 누렇게 바래는 걸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그칠 줄 모르는 세월이라는 파도 앞에서는 모든 게 빛이 바랬다. 다이달로스도, 미노타우로스의 핏방울도, 스킬라의 허기도, 텔레고노스조차도. 인간의 수명은 육십 년에서 칠십 년이었다. 이후에 아이는 저승으로 떠나겠지만, 신은 죽음과 대척줌 있기에 나는 그곳으로 절대 건너갈 수가 없었다. 어둑어둑한 언덕과 칙칙한 벌판, 그 사이를 천천히 움직이는 하얀 그림자를 상상해보았다. 어떤 이는 생전에 사랑했던 사람들과 손을 잡고 걸어갔다. 또 어떤 이는 사랑했던 사람들이 언젠가 찾아올 거라 확신하며 기다렸다. 사랑한 적 없었던 사람들, 삶이 고통과 공포로 얼룩졌던 사람들을 위해서는 레테라는 시커먼 강이 마련되어 있였다. 그 강물을 마시면 기억을 지울 수 있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위안인가.
(발췌) 키르케, 그가 말한다. 괜찮을 거예요.
신탁이나 예언이 아니다. 어린애한테 함직한 애기다. 그가 악몽을 꾼 아이를 안고 흔들며 다시 재울 때, 베인 상처를 소독할 때, 뭔가에 쏘인 곳을 진정시킬 때 그렇게 애기하는 걸 들어왔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의 살결이 내 살결만큼 익숙하다. 밤공기 위로 따뜻하게 번지는 그의 숨소리가 들리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진다. 그는 아프지 않을 거라는 뜻에서 한 말이 아니다. 무섭지 않다는 뜻에서 한 말도 아니다. 그저 우리가 여기 있다는 뜻에서 한 말이다. 파도 속에서 헤엄친다는 게, 흙을 밟고 걸으며 그 느낌을 감상한다는 게 그런 뜻이다. 살아 있다는 게 그런 뜻이다.
이 소설은 거의 일대기를 쓴 소설이라 나올 수밖에 없었겠지만 '여성 서사'로 강조해놓고 '엄마의 이야기'가 되면 뭔가 김이 샌다.
'말하다 > 도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에세이]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6) | 2024.11.21 |
|---|---|
| 패키지 (2) | 2024.11.19 |
| 최재천의 곤충사회 (7) | 2024.11.14 |
| 죽은 자의 집 청소 (3) | 2024.11.13 |
| 희랍어 시간 (6) | 2024.11.11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