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랍어 시간 도서 표지/한강 장편소설 문학동네

 

서명: 희랍어 시간
저자: 한강
출판사: 문학동네

 

  여자는 희랍어를 배운다. 남자는 희랍어를 가르친다. 여자는 발화할 수 없고, 남자의 시야는 흐려지고 있다. 두 사람이 어둠 속에서 대화한다.

 

(발췌)  지금쯤은 고백해도 괜찮을까.
  네가 연습하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나는 투덜거리곤 했지만, 너는 다혈질의 성격대로, 오랜 시간 훈련받은 성량으로 나를 꼼짝 못하게 밀어붙이곤 했지만, 아마 넌 짐작 못 했을 거야. 서울보다 추웠던 프랑크푸르트에서 맞은 독일의 첫 겨울, 낯선 교실과 언어와 사람들에 지쳐 돌아온 내가, 아파트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네 노래를 들으며 벽에 기대 앉아 있곤 했다는 걸. 그 목소리가 어떻게 내 얼굴을 만져주었는지.
 
  집세가 싼 마인츠로 옮겨간 이듬해 겨울, 사춘기에 막 접어든 네가 나에게 했던 말이 있지. 아시아 사람들을 상대로 한 식료품점을 연 어머니가 늦도록 집을 비운 사이, 텅 빈 식탁 앞에서 지독히 맛없는 뮈슬리를 나눠 먹던 저녁에. 고개를 수그린 채 너는 중얼거렸어. 형편없는 악기인 네 육체와, 이제 곧 불러야 할 노래 사이의 정적이 벼랑처럼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고.
  빨갛게 언 손이 시리다고 말하는 여섯 살 여자아이의 얼굴로, 아무것도 알 수 없어졌다는 듯 너는 나를 우두머니 건너다보았지. 그때 생각했어. 네 목소리론 네 얼굴을 만져줄 수 없는 모양이구나. 그러면 무엇이 너를 만져줄까. 아마 나는 절망을 느꼈던 것 같아.
(발췌)  고백하자면 말이야…… 내가 나중에 어떤 식으로든 책을 내게 되면, 그게 꼭 점자로 제작되었으면 좋겠어. 누군가가 손가락으로 더듬어서, 끝까지 한 줄 한 줄 더듬어서 그 책을 읽어주면 좋겠어. 그건 정말…… 뭐랄까, 정말 그 사람과 접촉하는 거잖아. 그렇지 않아?

 

(발췌) ……내 말이 들리나요?

  그녀는 그의 말을 똑똑히 듣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모른다. 그녀는 그를 똑똑히 보고 있다. 그것 역시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는 모른다. 책상에서 비스듬히 비치는 갓등의 빛을 받아 절반 가까이 그늘진 그의 얼굴을, 그녀는 온 힘을 다해 건너다보고 있다.
  
  ……거기서, 듣고 있나요?

  그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그녀는 본다. 드문드문 튄 핏자국이 이제 흑갈색으로 굳은 흰 셔츠를 입은 그가, 신중하게 발을 내디뎌 그녀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본다. 그가 그녀보다 더 지쳐 있는 것을, 한 걸음 한 걸음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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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췌문 다 날려서 의욕상실..

다른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그래도 온기를 나눌 수는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책. 머리가 나빠서 직설적인 책을 좋아한다. 그래서 《흰》이 서사보다는 시적인 문장이 부각되는 책이라 취향이 아니었는데, 이 책은 두고두고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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